산소 가는 길』은 부모를 잃고, 나이 들어 더 많은 것을 '사라진' 상태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조용한 애도이자 삶의 독백입니다. '산소도 없는'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허공의 풍경이 아니라, 삶의 근간을 잃은 허허로운 감정을 응축한 이미지입니다. 붉은 동백꽃처럼 진한 감정을 품었지만, 놓을 곳이 없어 달 속에 떨어지는 그 끝은 곧 인간이 겪는 궁극의 상실, 애도의 불가능성, 남은 이의 숙명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라진 것이 더 많은 나이에 / 슬픔은 침묵이라고”는 시 구절이 쉽게 마음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인생의 후반부, 잃어버린 사람과 시간, 말하지 못한 말들, 회복할 수 없는 것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젊을 땐 슬픔을 소리 내어 울거나 호소하며 표현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너무 많이 사라져 버린 탓에 그조차 하지 못하는, 그래서 차라리 말 없는 ‘침묵’으로 남겨두는 슬픔. 이 구절은 비탄의 언어조차 메마르게 만드는 세월의 무게를 담담하게 응시합니다. 그 무게를 견디며 말없이 걸어 내려오는 ‘산소 가는 길’은, 결국 ‘삶의 길’이기도 하지요.
산소 가는 길
동백꽃 사들고 산소에 간다
구파발 지나 서오릉을 돌아
용미리 어디쯤 서성거리다 돌아온다
돌아가실 때 쌓인 눈이
여적 안 녹은 건가
어렸을 적 아버지 뿌리고
내려오던 산비탈 눈 위에
까치 한 마리 오래도록 발이 시리다
나뭇가지 사이 허공 너머
봉분만한 구름 산소도 없는
아버지 어머니 성묘 다녀오는 길
사라진 것이 더 많은 나이에
슬픔은 침묵이라고
손에 쥔 붉은 동백꽃
놓을 곳 없어
놓을 곳이 없어
달 속에 진다
생의 정면
어느 순간 와락 진저리 치질 때가 있다
허리를 굽히고 마당을 쓰는데
머리 위로 쓰윽 이상한 바람이 지나간 것 같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무 일 없듯이 가을 하늘 너무 푸르고 맑을 때
힘이 없는데 정면으로 맞장떠야 할
어느 한순간이 올 때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뙤약볕 시골길
흰 적막이 가득 들어 있을 때
맑은 정신으로 눈이 떠진 새벽
오로지 홀로 나와 맞닥뜨릴 마지막 시간이 떠오를 때
홀연 엄습하는 생의 낯섦을 견디며
불안한 영혼들이 숙연해지고 고요해져간다
이 시는 "생의 정면"이라는 제목처럼, 피할 수 없는 삶의 순간들과 그 정면 대면의 깊이를 조용히 직시하게 합니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어떤 순간은 그 자체로 우리를 덮쳐 오는 생의 진실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일상의 소소한 장면들—마당을 쓸다 문득 느낀 바람, 고인이 된 아버지의 부재 속에 선명하게 푸른 가을 하늘, 홀로 마주하는 적막한 새벽—을 통해, 존재의 낯섦과 숙명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경험을 서술합니다. 이 시의 가장 큰 미덕은 ‘설명하지 않음’에 있습니다.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려하지 않고, 독자가 스스로 그 장면의 정적과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삶이란 결국, 이렇듯 아무런 사건도 없는데 갑자기 우리를 휘감는 고요한 두려움과 경외의 순간들로 가득한 것이 아닐까요.
- 저자
- 권대웅
- 출판
- 문학동네
- 출판일
- 2017.08.25
<시 한줄 7> 함민복 시인, 그리움, 가난, 슬픔, 그리고 자조적인 웃음소리, 낮은 곳을 향한 시의 윤
함민복 시인이 우리 동시대의 시인이라는 것이 사뭇 뭉근하다.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가슴속에 스멀스멀 스며드는 감정의 편린은 아련한 슬픔과 그리움, 이제는 먼 옛날의 일로 여겨지는 가난,
barunmaum.com
<시 한 줄 6> 선잠, 연년생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시인
만약에 박준 시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그의 시집을 읽는다면 거의 모든 독자들은 말하리라. 그는 여성 시인이라고. 그는 섬세하다. 그는 시인답게 모든 사람과 사물을 관찰한다. 그리고 찰
barunmaum.com
<시 한줄 5> 누군가의 그 말, 천 양희: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 무게는? 두근 두근,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천양희 시인은 바로 두근두근 합해서 네근이라고 했습니다. 뭐, 꼭 네 근만이겠습니까? 퀴즈 하나 낼까요?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장기
barunmaum.com
<시 한줄 4>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징하도록 애절한 사부곡 (思父曲)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에 대한 시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손택수 시인은 시집 에서 쓰러진 아비가 입원한 병원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등에 새겨진 지게자국을 보게 된다. 그 아버지의 모습은 이
barunmau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