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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에 대한 시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손택수 시인은 시집 <호랑이 발자국>에서 쓰러진 아비가 입원한 병원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등에 새겨진 지게자국을 보게 된다. 그 아버지의 모습은 <소가죽북>이 아니던가.
손택수 시인의 눈은 항상 그렁그렁하다.
아버지의 등을 밀며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에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 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시집 <호랑이 발자국> 중에서
소가죽북
소는 죽어서도 매를 맞는다
살아서 맞던 채찍 대신 북채를 맞는다
살가죽만 남아 북이 된 소의
울음소리, 맞으면 맞을수록 신명을 더한다
노름꾼 아버지의 발길질 아래
피할 생각도 없이 주저앉아 울던
어머니가 그랬다
병든 사내를 버리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쥐여뜯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흐느끼던 울음에도
저런 청승맞은 가락이 실려 있었다
채식주의자의 질기디 질긴 습성대로
죽어서도 여물여물
살가죽에 와닿는 아픔을 되새기며
둥 둥 둥 둥 지친 북채를 끌어당긴다
끌어당겨 연신 제 몸을 친다
외할머니의 숟가락
외갓집은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 숟가락부터 우선 쥐여주고 본다
집에 사람이 있을 때도 그렇지만 사람이 없을 때도,
집을 찾아온 이는 누구나
밥부터 먼저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게고집 센 외할머니의 신조다
외할머니는 그래서 대문을 잠글 때 아직도 숟가락을 쓰는가
자물쇠 대신 숟가락을 꽂고 마실을 가는가
들은 바는 없지만,
그 지엄하신 신조대로라면
변변찮은 살림살이에도 집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그릇의 따순 공기밥이어야 한다
그것도 꾹꾹 눌러 퍼담은 고봉밥이어야 한다
빈털터리가 되어 십년 만에 찾은
외갓집상보처럼 덮여 있는 양철대문 앞에 서니
시장기부터 먼저 몰려온다 나도
먼길 오시느라 얼마나 출출하겠는가
마실 간 주인 대신 집이 쥐여주는 숟가락을 들고 문을 딴다
#손택수 #손택수시인 #호랑이발자국 #아버지의등을밀며 #외할머니의숟가락 #소가죽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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