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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시 12> 토막말 -정양

by 글맛글멋 2025.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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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시인

 

 

 

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 (창비, 1997)

 

가을 바다, 토막말에 새겨진 생의 흔적

정양 시인의 '토막말'을 다시 읽는 이 시간, 가을 바닷가의 쓸쓸함과 그 위를 떠다니는 절절한 그리움이 마음을 저민다. 한 생이 다하고 남은 것은 결국 몇 마디 토막말과 어지러운 발자국뿐이라는 듯, 시는 짠 바닷바람처럼 시린 질문들을 던진다. 고인이 남긴 이 시 한 편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과 남겨질 흔적들에 대해 깊이 사색하게 만드는 명징한 거울과 같다.

 

대문짝만 한 글씨, 하늘에 닿고픈 절규

시의 시작은 가을 바닷가, 썰물 진 모래밭에 새겨진 거대한 글씨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대문짝만 한 글자들이 하늘에서 읽기 수월할 것 같다는 시인의 말은, 이 글씨를 쓴 이의 간절함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는 듯, 온 마음을 담아 써 내려간 글자 하나하나에 쓰라린 그리움이 배어 있다. 이 투박하고 거친 '토막말'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향한 맹목적이고 순수한 사랑, 혹은 사무치는 회한을 발견한다. 비록 비속어가 섞여 있지만,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진솔하고 적나라하게 삶의 고통과 갈망을 드러내 보인다. 자연 속에 새겨진 이 인위적인 글자들은 역설적으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기고 싶은 흔적에 대한 원초적인 욕구를 대변한다.

 

씨펄 근처의 발자국, 삶의 고통과 아름다움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는 구절은 시인의 심미안이 빛나는 지점이다. 그 막말 근처의 발자국들은 글씨를 쓴 이의 격렬한 감정의 흔적이며, 살아있음의 증거이다. 어지러운 발자국은 마치 삶의 굴곡과 혼돈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는 그 발자국 위에서 고통을 견디는 한 인간의 모습을 상상한다. 시인은 묻는다.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이 질문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터져 나온 듯한 절규가 어떻게 이토록 서정적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이는 아마도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감정, 즉 사랑과 상실, 그리움과 고통이라는 원형적 경험에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는 시인의 고백은, 그 막말이 단지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재된 아픔임을 깨닫게 한다. 자연의 냉혹함과 인간의 뜨거운 감정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이 대비는 시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밀물과 토막말, 소멸과 각인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라는 구절은 '토막말'을 쓴 주인의 부재를 더욱 명확히 한다. 그 글씨는 홀로 바닷가에 남겨져, 마치 삶의 한 단면을 박제해 놓은 듯하다. 그리고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인간의 흔적은 한없이 미약하다. 바다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토막말' 또한 밀물에 쓸려 사라질 운명이다. 시인은 그 사라질 말에 "몸이 저리다"고 고백한다. 이는 단순한 글자의 소멸이 아니라, 한 인간의 절절한 그리움과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통함이다.

 

하지만 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저녁놀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마지막 경의를 표하는 듯, 그 짧은 삶의 흔적을 붉게 물들인다. 이는 단순히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시인이 그 '토막말'에 부여하는 의미의 무게를 보여준다. 사라질 운명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담긴 생의 통증과 절규는 영원히 각인된다는 역설적인 메시지다. 마치 고인의 시가 시간이 흘러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듯, '토막말'은 소멸 앞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시대를 넘어선 공감, 삶의 진정성

정양 시인의 '토막말'은 비록 짧은 시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인간 본연의 감정과 자연에 대한 통찰은 시대를 넘어선 공감을 자아낸다. 이 시는 우리에게 진정성 있는 삶의 의미와 흔적을 남기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세상에 남기고 싶은 것은 무엇이며, 사라져갈 것들 속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영원할 수 있는가. 고인이 남긴 이 시 한 편이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울림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닷가 토막말처럼 짧고 덧없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진정한 그리움과 사랑의 흔적은 영원히 빛을 발한다는 것을 이 시는 감성적으로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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