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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줄

<시 한줄 9>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 권대웅, 불수의근의 감정의 조각들

by 글맛글멋 2025.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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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웅의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에 나오는  '우두커니', '멍하니', '물끄러미', '문득', '정처 없이', '와락'이라는 단어들에 멈추어 서게 됩니다. 이 모든 단어들은 우리의 불수의근 (不隨意筋,  involuntary muscle)에 의해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근육으로 작동하는 감정을 표출하게 하는 단어들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스스로 조절이 되지 않는 될 수 없는 본능적인 감정의 편린들입니다. 저도 모르게  '울컥'해졌습니다. 은유 작가는 이렇게 말했지요. 울컥이란 존재의 딸꾹질이라고. "나 여기 있어요"라는 외침이요, 구원의 SOS를 보내는 것이 이런 감정들이 아닐까요? 

우두커니 와락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모든 단어들은 이음동의어 (異音同義語)라고. 인간의 의지 없이, 텅 빈 그리고 인위 (人爲)가 작동하지 않는 순수한 감정들입니다. 시선을 모으고, 몰입을 뛰어넘는 집중입니다. 이유 없이, 그 어느 것도 의도하지 않는, 그저 시나브로 점점 깊이 빠져드는 진하고 농밀하게 흘러내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이 시를 읽으실 때 아래와 같이 볼드 처리한 단어에 잠시 멈추어 서서, 곱씹으면서 읽어 보세요. 

 

 

이런 기분이 들 때는 언제였나요?

그리고 그때는 어던 기분이었나요?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권대웅

 

지나간 그 겨울을 우두커니라고 불렀다

견뎠던 모든 것을 멍하니라고 불렀다

희끗희끗 눈발이 어린 망아지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마음에도 연민이 있는 것일까

떠나가는 길 저쪽을 물끄러미라고 불렀다

사랑도 너무 추우면

아무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표백된 빨래처럼 하얗게 눈이 부시고

펄렁거리고 기우뚱거릴 뿐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봄 햇빛 한 줌

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고 불렀다

그 곁을 지나가는 바람을 정처 없이라고 불렀다

떠나가고 돌아오며 존재하는 것들을

다시 이름 붙이고 싶을 때가 있다

홀연 흰 목련이 피고

화들짝 개나리들이 핀다

이 세상이 너무 오래되었나 보다

당신이 기억나려다가 사라진다

언덕에서 중얼거리며 아지랑이가 걸어온다

땅속에 잠든 그 누군가 읽는 사연인가

그 문장을 읽는 들판

버려진 풀잎 사이에서 나비가 태어나고 있다

하늘 허공 한쪽에 스르륵 풀섶으로 쓰러졌다

주르륵 눈물이 났다

내가 이 세상에 왔음을 와락이라고 불렀다

꽃 속으로 들어가 잠이 든 꿈

꽃잎 겹겹이 담긴 과거 현재 미래

그 길고 긴 영원마저도

이 생을 찰나라고 부르는가

먼 구름 아래 서성이는 빗방울처럼

지금 나는 어느 과거의 길거리를 떠돌며

또다시 바뀐 이름으로 살아나고 있는 것일까

 

시집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중에서,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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