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웅의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에 나오는 '우두커니', '멍하니', '물끄러미', '문득', '정처 없이', '와락'이라는 단어들에 멈추어 서게 됩니다. 이 모든 단어들은 우리의 불수의근 (不隨意筋, involuntary muscle)에 의해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근육으로 작동하는 감정을 표출하게 하는 단어들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스스로 조절이 되지 않는 될 수 없는 본능적인 감정의 편린들입니다. 저도 모르게 '울컥'해졌습니다. 은유 작가는 이렇게 말했지요. 울컥이란 존재의 딸꾹질이라고. "나 여기 있어요"라는 외침이요, 구원의 SOS를 보내는 것이 이런 감정들이 아닐까요?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모든 단어들은 이음동의어 (異音同義語)라고. 인간의 의지 없이, 텅 빈 그리고 인위 (人爲)가 작동하지 않는 순수한 감정들입니다. 시선을 모으고, 몰입을 뛰어넘는 집중입니다. 이유 없이, 그 어느 것도 의도하지 않는, 그저 시나브로 점점 깊이 빠져드는 진하고 농밀하게 흘러내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이 시를 읽으실 때 아래와 같이 볼드 처리한 단어에 잠시 멈추어 서서, 곱씹으면서 읽어 보세요.
이런 기분이 들 때는 언제였나요?
그리고 그때는 어던 기분이었나요?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권대웅
지나간 그 겨울을 우두커니라고 불렀다
견뎠던 모든 것을 멍하니라고 불렀다
희끗희끗 눈발이 어린 망아지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마음에도 연민이 있는 것일까
떠나가는 길 저쪽을 물끄러미라고 불렀다
사랑도 너무 추우면
아무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표백된 빨래처럼 하얗게 눈이 부시고
펄렁거리고 기우뚱거릴 뿐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봄 햇빛 한 줌
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고 불렀다
그 곁을 지나가는 바람을 정처 없이라고 불렀다
떠나가고 돌아오며 존재하는 것들을
다시 이름 붙이고 싶을 때가 있다
홀연 흰 목련이 피고
화들짝 개나리들이 핀다
이 세상이 너무 오래되었나 보다
당신이 기억나려다가 사라진다
언덕에서 중얼거리며 아지랑이가 걸어온다
땅속에 잠든 그 누군가 읽는 사연인가
그 문장을 읽는 들판
버려진 풀잎 사이에서 나비가 태어나고 있다
하늘 허공 한쪽에 스르륵 풀섶으로 쓰러졌다
주르륵 눈물이 났다
내가 이 세상에 왔음을 와락이라고 불렀다
꽃 속으로 들어가 잠이 든 꿈
꽃잎 겹겹이 담긴 과거 현재 미래
그 길고 긴 영원마저도
이 생을 찰나라고 부르는가
먼 구름 아래 서성이는 빗방울처럼
지금 나는 어느 과거의 길거리를 떠돌며
또다시 바뀐 이름으로 살아나고 있는 것일까
시집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중에서, 문학동네
<시 한 줄 8> 권대웅 -산소 가는 길 & 생의 정면
산소 가는 길』은 부모를 잃고, 나이 들어 더 많은 것을 '사라진' 상태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조용한 애도이자 삶의 독백입니다. '산소도 없는'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허공의 풍경이 아니라, 삶의
barunmaum.com
<시 한줄 7> 함민복 시인, 그리움, 가난, 슬픔, 그리고 자조적인 웃음소리, 낮은 곳을 향한 시의 윤
함민복 시인이 우리 동시대의 시인이라는 것이 사뭇 뭉근하다.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가슴속에 스멀스멀 스며드는 감정의 편린은 아련한 슬픔과 그리움, 이제는 먼 옛날의 일로 여겨지는 가난,
barunmaum.com
<시 한 줄 6> 선잠, 연년생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시인
만약에 박준 시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그의 시집을 읽는다면 거의 모든 독자들은 말하리라. 그는 여성 시인이라고. 그는 섬세하다. 그는 시인답게 모든 사람과 사물을 관찰한다. 그리고 찰
barunmaum.com
<시 한줄 5> 누군가의 그 말, 천 양희: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 무게는? 두근 두근,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천양희 시인은 바로 두근두근 합해서 네근이라고 했습니다. 뭐, 꼭 네 근만이겠습니까? 퀴즈 하나 낼까요?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장기
barunmaum.com
<시 한줄 4>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징하도록 애절한 사부곡 (思父曲)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에 대한 시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손택수 시인은 시집 에서 쓰러진 아비가 입원한 병원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등에 새겨진 지게자국을 보게 된다. 그 아버지의 모습은 이
barunmaum.com
'시 한 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한줄 7> 함민복 시인, 그리움, 가난, 슬픔, 그리고 자조적인 웃음소리, 낮은 곳을 향한 시의 윤리, 긍정적인밥, 소스라치다, 섣달그믐, 선천성그리움 (2) | 2025.05.03 |
---|---|
<시 한 줄 6> 선잠, 연년생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시인 (2) | 2025.04.30 |
<시 한줄 5> 누군가의 그 말, 천 양희: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 무게는? 두근 두근, (0) | 2025.04.29 |
<시 한줄 4>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징하도록 애절한 사부곡 (思父曲) (0) | 2025.04.28 |
"야 너두 할 수 있어! 너에게만 알려줄께!!" 알고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텍스트 힙, 멋진 독서 비법의 모든 것 (6) | 2025.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