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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의 시 10> 실업,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여림 시인

by 글맛글멋 2025.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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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림' 시인의 본명은 '여영진'이다. 스승이었던 최하림 시인의 끝자를 따와 '여림'이라고 필명을 지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자신의 필명을 무척이나 잘 지은 것 같다. '여림'이란 시인은 여리고 여린, '여림'을 평생 몸에 품고, 살다가 (살아 있다가), 스러진, '여린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하 (如何)라고 하고, 여하 (如何) 튼 견디며 살아야 했다. 여림 시인은  35년을 살다 간 단명 (短命)의 요절한 시인이다. 

 



<안갯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 >  시집은 시인 여림의 사후, 지인들이 펴낸 '유고 (遺稿) 시집'이다. 여림은 신춘문예 당선으로 시인이 되었으나, 정작 살아생전 단 한 권의 시집도 펴내지 못한, 시인 아닌 시인이다. 문우들이 시인의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유고 110여 편을 바탕으로 유고 시집인 <안갯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를 고인의 1주기에 출간하였다고 한다. '유고 (遺稿) 시집'은 죽은 시인의 시집이다.  그는 죽어서야 비로소 시인이 된 시인이다. 

<실업>이란 시는 시인 여림의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그저 행복한 (행복을 위장한) 픽션 속에서 살고 있는 (살고 싶은) 시인은, 마지막 연에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가겠습니"라고 호출기 (삐삐)에 메시지를 남긴다고 했다. 존재하지 않는 부재 (不在) 중의 희망은 부재 (不在)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업

                                            -여림-

 

즐거운 나날이었다 가끔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 떼가 역으로

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 나는 오후 내내

순환선 열차에 앉아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가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산으로도 가고 강으로도

가고 아버지 산소 앞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이면 친구들을 만나 여느 날의 퇴근길처럼

포장마차에 들러 하루분의 끼니를 해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름다웠다 아내와

아이들의 성적 문제로 조금 실랑이질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다음날 해야 할 일들로

가슴이 벅차 오히려 잠을 설쳐야 했다

 

이력서를 쓰기에도 이력이 난 나이

출근길마다 나는 호출기에 메시지를 남긴다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근데 손뼉을 칠 만한 이유는 좀체
떠오르지 않았어요.

소포를 부치고,
빈 마음 한 줄 같이 동봉하고
돌아서 뜻 모르게 뚝,
떨어지던 누운물.

저녁 무렵,
지는 해를 붙잡고 가슴 허허다가 끊어버린 손목.
여러 갈래 짓이겨져 쏟던 피 한 줄.
손수건으로 꼭, 꼭 묶어 흐르는 피를 접어 매고
그렇게도 막막히도 바라보던 세상.
그 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울었습니다.

흐르는 피 꽉 움켜쥐며 그대 생각을 했습니다.
홀로라도 넉넉히 아름다운 그대,

지금도 손목의 통증이 채 가시질 않고
한밤의 남도는 또 눈물겨웁고
살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 있고 싶습니다.

뒷모습 가득 푸른 그리움 출렁이는 그대 모습이 지금
참으로 넉넉히도 그립습니다.

내게선 늘, 저만치 물러서 저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여,
풀빛 푸른 노래 한 줄 목청에 묻고
나는 그대 생각 하나로 눈물겨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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